일제시대를 실제로 살아본 분들의 증언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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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Vanessa 날짜24-09-25 14:28 조회2회 댓글0건본문
덕유산에서 부산고구려$ 발원한 경호강과 지리산에서 내쳐 달려온 덕천강 물길이 합쳐 만들어진 것이 진양호(晉陽湖)이다. 진양호는 1969년 완공된 낙동강 유역 최초의 다목적댐인 남강댐 건설로 형성된 호수이다. 진양은 진주의 옛 이름이다. 진주는 통일 신라 시대인 757년(신라 경덕왕 16)부터 강주(康州)로 불리면서 경남 지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이전 서부 경남의 중심지는 합천이었다. 합천 황강변 합벽루합천은 낙동강의 지류인 황강을 통해서는 산청, 거창과 연결되고 삼가 방면에서는 남강 상류를 이용해 진주지역과도 소통할 수 있는 곳이다. 황강 물안개와 함벽루우암 송시열의 함벽루 글씨 합천 대야성(大耶城)은 백제로부터 경주에 이르는 가장 짧은 경로에 있다. 대야성은 황강을 앞에 두고 있어, 서쪽으로부터의 백제 침입을 막는 데 최적의 장소였다. 642년 신라는 대야성을 백제에게 빼앗겼다. 이때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는 비참한 죽음을 맞고, 신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김춘추가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을 만나 도움을 부산고구려$ 청한 것이 이때이다.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고구려는 진흥왕 때 신라가 점령한 죽령(竹嶺,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 사이의 고개) 이북 지역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김춘추를 억류한다. 김춘추는 고구려 보장왕의 총신 선도해에게 뇌물을 주고 살길을 모색한다. 선도해가 김춘추를 찾아와 술을 마시며 넌지시 들려준 것이 거북이와 토끼 이야기 ‘구토지설(龜兎之說)’이다. 육지에 가서 간을 갖고 오겠다고 했던 달아났던 토끼처럼, 김춘추는 신라에 돌아가 왕에게 허락을 받겠다고 거짓 약속을 하고 고구려를 빠져나온다. 인도의 설화가 기원인 ‘구토지설’은 나중에 판소리 수궁가의 뼈대가 된다. 전 세계적으로 6억 회 이상의 유튜브 조회 수를 기록한 이날치 밴드의 ‘범 내려온다’도 판소리 수궁가의 한 대목으로 충성스러운 거북이가 토끼를 찾아가다가 범을 만나 위기를 겪는 장면이다. 구사일생으로 고구려를 탈출한 김춘추는 김유신과 함께 삼국을 통일한다. 신라는 이제 서쪽으로부터의 침입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백제가 있을 때 부산고구려$ 최전선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던 합천의 위상은 자연스레 낮아졌다. 이후 서부 경남의 중심지는 교통이 편리하고 물산이 풍부한 진주가 되었다. 진주는 신라의 9주 가운데 한 곳이었고, 고려 성종 때에도 전국의 12목의 하나였다. 1896년 전국이 13도 체제로 개편될 때 경상도가 남북으로 나뉘면서 ‘경상남도’라는 행정구역이 생기고 진주는 관찰부 소재지가 되었다. 진주는 일제 강점기에도 경상남도 도청소재지였으나 1925년 일제는 도청을 부산으로 옮겼다. 도청 이전으로 경남지역 중심지로서 진주의 위상은 낮아질수 밖에 없었다. 진주의 남쪽을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남강(南江)’이다. 촉석루 앞을 흐른다고 해서 촉석강(矗石江)이라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집트의 나일강이 그랬던 것처럼, 농업지역에서 풍요와 범람은 동전의 앞뒷면 같은 것이기도 했다. 진주는 오랜 옛날부터 상습 침수지역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여러 차례 진주 시가지의 80% 정도가 물에 잠겼다는 기록도 있다. 진주 진양호 진주 남강으로 흘러드는 물은 북서쪽의 남덕유산과 지리산의 부산고구려$ 높은 산과 골짜기에서 비롯한 경호강과 덕천강이다. 경호강과 덕천강은 진주 직전, 지금은 수몰된 광탄진(廣灘津)에서 합쳐져 비로소 남강을 이룬다. 진주성 앞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가는 남강의 유속은 매우 느리다. 남강은 함안과 의령을 남북으로 가르면서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가는데, 여기서부터 도로에 비유하면 상습적으로 교통침체를 빚는 병목 현상 구간이다. 남강은 창녕에서 낙동강과 합류하는데, 합류 직후인 밀양 삼랑진에서 양산 물금까지 20km 정도가 특히 그렇다. 삼랑진(三浪津)은 세 개의 파도가 있는 나루라는 뜻인데, 남강을 받아들여 덩치를 키운 낙동강과 밀양강, 그리고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말한다. 밀물 때는 삼랑진까지 바닷물이 올라왔다는 의미이다. 많은 비가 내려 강의 수량이 갑자기 늘어나고, 여기에 바다의 만조 시기와 겹치면, 상류와 지천으로 강물이 역류해 피해를 키웠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진양호이다. 진양호는 진주뿐만이 아니라 함안, 창녕, 밀양 등의 홍수를 예방하고 하류의 하천 습지를 옥토로 만들었다. 부산고구려$ 진양호의 물은 대부분 낙동강을 향해 흘러가지만, 홍수가 예상되면 가화천으로 물을 방류해 바다로 내보낸다. 가화천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하다. 가화천은 낙동강 수계와 관련이 없는 작은 실개천에 불과했지만 1969년 남강댐 완공과 더불어 진양호와 연결되어 진양호의 물을 방류하는 방수로, 인공하천이 되었다. 가화천은 길이가 10Km 남짓에 평상시에는 하천 유지 수량만 겨우 흘러 늘 바닥이 드러나 보이는 앙상한 모습이지만, 역할의 중요성 때문에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국가하천이 되었다. 진주 가화천사람들의 안목은 비슷한지 조선 시대에도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다. 정조가 죽기 4년 전인 1796년(정조 20) 5월 8일 자 ;에는 장재곤(張載坤)이라는 사람이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남과 호남의 경계에 있는 지리산에서 샘물이 솟아 나와 긴 강을 만들고, 그 강이 곧장 진주로 흘러가 다시 김해에 이릅니다. 그런데 한번 장마가 지면 함안·창원·초계·영산·양산·현풍·김해·칠원·의령·창령·밀양·진주·성주 등 13개 부산고구려$ 고을의 강에 인접한 토지가 모두 침수되어 한 포기도 수확할 것이 없게 됩니다. 이 강 상류에는 진주의 광탄(廣灘)과 지소두(紙所頭)라는 곳이 있는데, 양쪽 강 안이 가파른 절벽이고 지세가 좁고 낮으며 중앙에 우묵한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부터 물길을 뚫어 강물의 방향을 돌려 사천(泗川) 바다로 흘러가게 한다면, 그 형세가 마치 병을 거꾸로 세워 쏟아붓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곳은 바다와의 거리가 25리에 불과하고 뚫고 소통시킬 곳도 한 마장(馬場)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길을 뚫은 뒤에 지소두 아래에 제방을 쌓아 물이 범람하지 못하게 한다면 13개 읍의 허다하게 침수되던 곳이 장차 훌륭한 농지가 될 것입니다.“시대를 지나치게 앞섰던 장재곤의 아이디어는 채택되지 않았다. 정조의 지시를 받은 경상도 관찰사는 “지역의 형세와 백성들의 뜻이 전혀 다르고 장재곤이라는 자는 호적에 실려 있지도 않으며 행동이 허황됩니다.”라고 보고한다. 양반도 아니었던 장재곤의 생각이 ;을 지은 혜경궁 부산고구려$ 홍씨에게 어떻게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정조 시대 나랏일의 결정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강댐물을 가화천으로 방류하는 모습 가화천 공사는 조정의 검토 지시에도 불구하고 임기만 채우고 떠나면 그뿐인 관찰사 입장에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프로젝트였을 것이다. 당시 사대부들의 전통적인 자연관과도 배치되는 공사였다. ‘산’의 ‘줄기’를 끊는 공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리에서 배우는 ‘산맥(山脈)’이라는 낱말은 19세기까지는 우리나라에 없었다. ‘산맥’은 20세기 초 일본 지리학자였던 고토 분지로가 1903년 한반도의 지질구조를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도입된 개념이다. 전통적인 한국인들의 산과 물줄기 인식 개념은 이와는 달랐다. 1770년(영조46) 무렵 발간된 신경준의 ;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라는 인식체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산자분수령’은 “산은 스스로 물을 가르는 분수령이 된다”는 뜻이고 다른 말로는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이다.하지만 장재곤의 말대로라면 낙남정맥의 고갯마루를 깎아내어 물줄기를 부산고구려$ 가화천과 연계시켜야 했다. 산줄기가 낮아 고갯마루를 조금만 깎아내어도 물줄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긴 하지만 어쨌든 산의 맥을 끊는 공사였다. 강물이 산을 뚫고 흐르는 사례를 당시 사람들이 사례를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에는 강원도 태백의 황지연못에서 발원한 낙동강의 최상류 황지천을 ‘천천(穿川)’, 구멍 뚫린 하천으로 기록하고 있다. 장재곤의 생각은 허황된 소리로 치부되었지만, 남강댐과 가화천 방수로 공사 이후 진주, 함안, 의령 일대의 홍수 문제는 완전히 사라지고 인근 늪지대가 농경지로 개간되었다. 반면 남강물이 방류되는 사천만 바다는 염도가 크게 낮아져 생태계가 완전히 바뀌고 정착성 어류들이 떠났다. 가화천의 하상(河床)이 드러나면서 100여 개의 백악기 공룡 발자국과 공룡 이빨, 경린어류의 비늘이 발견되었다. 1997년 가화천은 천연기념물 제390호로 지정되었다. 가화천은 작지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이다. 27년을 목표로 하는 사천시의 ‘가화 휴양레저 정원’이 완공되면 가화천은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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